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였다. 사상가·신학자·음악가로도 활동한 그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선교사로서 인류애를 적극 실천한 사람이다.
1875년 1월 14일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카이저스베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이 지역은 그가 출생할 당시에는 독일령(領)으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알자스가 원래대로 프랑스령(領)이 되었으므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피아노 연주에 능했으며 그가 다니던 귄스바흐 교회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1894년 스트라스부르크대학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파리와 베를린에서 칸트의 종교 철학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05년 프랑스 선교단의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교 의학부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해 사회활동가였던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하였고, 아내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갔다.
그는 가봉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정착하여 의료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은 그의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며,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그의 어려움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가봉 랑바레네는 프랑스령이 되었고 독일 국적의 슈바이처는 의료봉사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1917년 프랑스군 전쟁 포로가 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독일로 송환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 민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연주회와 철학과 신학 강연을 하였다. 1924년, 다시 랑바레네로 가서 활동을 재개하였고, 어려움 끝에 큰 병원을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전도와 진료에 전념하였는데, 1924년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28년에는 괴테상(賞)을 수상하고, 1951에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으며,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다. 진정 예절을 아는 성자였다.
북한이 다시금 대남 쓰레기 풍선을 날려 보내고 있다. 공자가 말한 관중에 대한 이야기 중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라는 것이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야 예의와 도덕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안정이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절이란 개인이나 사회 집단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나 행동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예절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다.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더러운 북한의 쓰레기 풍선에서 북한 당국의 편협한 속내와 함께 부자나라 우리 대한민국을 시샘하는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한때 북한은 남한보다 더 부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3대 세습의 철옹성 공산 독재정권의 예정된 비극이자 참사였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창고가 텅텅 비었고 의식조차 빈곤하기 이를 데 없으니 예절 따윈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북한은 또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같은 성자도 아예 생성조차 되지 않을 저질의 정치적 토양까지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자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음에 새삼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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