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뿌리 채인다고 청춘이 진다더냐 부는 바람에 그리움 속에 사무친 여린 가슴 어허야 돌아서 갈까 그리움 남아 어이하리 저 산마루 넘어가신 님 돌아올 줄 모르고 붉게 물든 서쪽 하늘만 애간장 타고 있구나 어허야 어허야 속절없이 어이할까나 스미는 바람 몸을 적신다 하늘아 울지 말아라“ =
2010년에 전추영이 발표한 <천둥소리>다. 천둥소리는 천둥이 칠 때 나는 소리다. 천둥은 벼락이나 번개가 칠 때 대기가 요란하게 울림을
뜻하는데 이를 어린아이가 보게 되면 놀라서 기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다양하고 십인십색이듯 천둥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회덕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제1기 대덕문화원 강좌 명심보감 성독 및 책거리] 행사를 취재했다.
명심보감 <효도편>을 보면 ‘내 몸을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를 시작으로 ‘부모님의 연세를 기억하라’, ‘밖에 나갈 때는 부모에게 행방을 알려라’, ‘자기 부모를 먼저 공경하라’, ‘부모님이 시키는 일은 즉시 해라’, ‘효자가 나라에도 충성한다’, ‘효자가 효자 아들을 둔다’고 했다.
따라서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부동의 명제다. 취재를 마친 뒤 저녁에는 막역한 문인 지인들을 만나 녹두삼계탕과 술을 공유했다. 그런데 대화 중에 어찌어찌하여 그만 내 과거사를 노출하는 바람에 나는 뒤늦은 통곡이라는 해프닝까지 벌여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때는 내가 일곱 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동네에 사시는 유모할머니 손에 의해 성장했음은 내가 그동안 저술한 책에서도 나온다. 여덟 살을 앞두고 나도 국민(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에 할머니는 애가 탔다.
할머니는 수소문하여 나의 생모가 살고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언뜻 보았지만 고대광실(高臺廣室) 비슷한 기와집에 대문도 엄청나게 컸다. ”여기가 네 엄마가 살고 있는 친정이란다. 잠시 후면 네 엄마가 나올 테니 얼굴이라도 똑똑히 마음에 새기거라!“
하지만 당시에도 고집불통이었던 나는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기조차 싫었다. 아무리 아버지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곤 하되 고작 생후 첫돌도 안 된 자기 아들까지 버리고 집을 나간 비정하기 짝이 없는, 자격 미달의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엄마로 추측되는 어떤 여자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짐작은 틀림이 없었다. ”얘가 선(善)이예요?“
당시의 내 이름은 현재의 ‘경석’이 아니라 외자로 ‘선’이였다. 착하게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었는데 훗날 아버지의 친구분이 단명할 이름이라며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해 주셨다.
할머니께서는 연방 나의 축 늘어진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라고 강요하셨지만 나는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싫어요!(자식을 버린 엄마가 무슨 엄마인가요!)“ -> 괄호 안의 말은 당시 내가 속으로 중얼거린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결국 나는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고 엄마는 연신 우느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시골 버스 안에서 할머니께 항의했다.
”도대체 왜 엄마를 보라고 하셨어요?“ ”네 엄마가 협조해 줘야 호적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너도 학교에 갈 수 있지 않겠니. 그래서...“ ”그래서 그 여자가 이제라도 내 호적을 만들어 준대요?“
”자신을 영원히 잊어달라는 말만 하더구나.“ 세월은 여류하여 나도 멀지 않아 ‘7학년’이 된다. 그동안 엄마를 극도로 미워했으며 심지어 증오까지 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얼마 전에 나 스스로 엄마를 용서했고,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되레 감사하다고 했다. 전추영의 가요처럼 저 산마루 넘어가신 님, 즉 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르고
돌뿌리 채인다고 흘러간 청춘이 되돌아올 리 없다. 내 삶은 어차피 천둥소리의 연속이었으니까.
아무튼 호적은 숙부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만들어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명심보감 <효도편>에서 강조한 ‘부모님의 연세를 기억하라’와 ‘밖에 나갈 때는 부모에게 행방을 알려라’는 물론이요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공경하라’ 역시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나저나 나의 생모는 과연 지금껏 생존해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