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이 발생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와 학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를 새로 만들어 물세를 걷는 등 각종 세금을 과도하게 수취하였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한 비를 세우는 데 주민들의 돈을 강제로 징수하는 등 탐관오리의 수탈과 비리를 저질렀다.
이에 전봉준 등의 농민 지도자들은 1893년 고부군 서부면 신중리 대뫼부락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월 10일 밤 배들평(이평) 말목장터에 1천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후 조병갑의 후임으로 온 신임 군수 박원명은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폐정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하여 농민들은 해산했으나, 일본 군경의 개입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의 규모는 커지게 되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는 세금(稅金)을 가혹(苛酷)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無理)하게 재물(財物)을 빼앗음을 뜻한다. 이럴 경우 특히 없는 서민은 죽을 맛이 된다.
조병갑은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이었다. 여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수령을 역임하는 동안 탐학 행위를 저질렀으며, 1892년(고종 29) 4월에 고부군수가 되었다.
1893년 흉년이 들자,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를 징수하는데, 부유한 농민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2만여 냥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여 냥을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고부 군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탐학 행위는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것이었다. 즉,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추수기에 수세(水稅)를 거둬들여 700여 섬을 착복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1893년 12월 전봉준(全琫準)을 앞세워 억울한 사정을 진정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4년 2월 농민들이 동학 접주 전봉준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전주로 도망가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사태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고부 민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여러 탐학 행위가 밝혀져 귀양을 갔다.
돈에 눈 먼 자의 전형적 말로라 할 수 있다. '음주 운전 뺑소니' 혐의를 받는 가수 김호중이 5월 24일 오후 구속됐다.
그 또한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공연만큼은 어떡해서든 치르겠다는 저의를 드러내 국민적 반감과 빈축을 자초했다. 그의 몰락을 보면서 일장춘몽(一場春夢), 아니 일주춘몽(一酒春夢)과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견리망의는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돈에 눈먼 자의 말로는 대부분 처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