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경비원으로 일할 적의 실화이다. "미안하지만, 담배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요?" 젊은 친구 하나가 그렇게 다가왔다. "아, 댁이 새로 입사해서 일한다는 사람이구려?" "네, 맞습니다." 흔쾌히 담배를 하나 꺼내 주었다.
한데 그게 '빌미'가 되었다. 툭하면 찾아와선 다시금 담배 '구걸'을 하는 그 젊은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직장 상사에게 물으니 리모델링한 3층의 중요한 시설물 경비로 새로 뽑은 인력이라고 했다.
같은 직장이라곤 하되 업무가 전혀 다른 장르인 까닭에 딱히 마주칠 일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렇지 한눈에 보기에도 내 아들보다 어려보이는 친구가 잊을 만 하면 찾아와 담배를 달라니 정말이지 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나는 의지가 약한 터여서 여태 담배를 못 끊고 있다. 따라서 광고 등지에서 금연을 하라고 '협박'을 하고, 마트에서 담배를 한 갑에 4천 원 이상이나 주고 사자면 늘 그렇게 이유 모를 죄책감까지 들곤 한다. 제기랄, 이놈의 담배는 애당초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철없던 지난 시절 담배를 배웠던 때가 어떤 흑역사(黑歷史)의 껄끄러움으로 다가오기 일쑤다. 여기서 말하는 '흑역사'는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일을 가리킨다.
하여간 당시 야근을 하던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문제의 그 친구가 또 다가왔다. 마치 절해고도인 양 별도로 관리 운영하는 시스템인지라 3층 경비원들은 여간해선 야간 근무자가 상주하는 1층 안내데스크엔 오지 않았다. 일종의 관례였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다시금 내 주변을 배회하면서 무언가를 부탁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척 보면 삼천리'랬다고 나는 그가 또다시 담배 부탁을 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안하지만 담배 좀 하나만…“ 순간 무언가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늘은 내가 000 씨한테 쓴소리를 한마디 하렵니다. 올해 나이가 어찌 됩니까?"
"서른하나입니다." 참았던 질타를 퍼부었다. "내 아들이 서른다섯이오. 그래서 하는 말인데 000 씨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도 평소 그처럼 담배를 꿔달라고 합니까? 입사한지도 한 달이 넘었고, 또한 급여를 받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막무가내 노가다판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는 없는 겁니다. 담배 태울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나 같았으면 자존심 상해서 벌써 끊었소! 아무튼 나로선 이게 당신한테 주는 마지막 담배요. 다시는 이런 부탁하지 마쇼!"
나도 어려서부터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래서 또래들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처서판(예전에, 막벌이 노동을 하는 험한 일판을 이르던 말)에까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다.
더 지나선 소위 '노가다'를 했다. 비록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함께 일하는 어르신들 앞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는 특권(?)만큼은 '합법적으로' 주어졌다. 워낙 일이 고돼서였다.
그렇긴 했더라도 언감생심 그 어떤 어르신들께도 감히 담배를 꿔달라곤 할 수 없었다. 그건 예의와 상식에도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금세 "싸가지 없는 놈"으로 찍히는 자충수의 부메랑이 되는 때문이었다.
담배는 마치 불륜의 마녀(魔女)와도 같아서 처음부터 아예 안면조차 트지 않는 게 상책이다. 다만, 이미 그의 포로가 되었다손 치더라도 어르신에게 담배를 꿔달라고까지 하는 건 상당한 결례다.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을 일컬어 쉬 '노가다'라고 한다. 이는 또한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어 '도카타(dokata = 土方)'에서 유래된 이 말은 일본말의 잔재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도 무언가 부정적 표현을 하자면 이 용어가 자주 인용되는 게 현실이다. 예컨대 "이건 알바가 아니라 차라리 노가다야!"라는 따위의 푸념이 그 방증이다. 기왕지사 배운 게 담배라면 하는 수 없다.
금연을 하면 좋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걸 "하라 마라"의 범주에선 빼겠다. 다만 새삼 강조코자 하는 건, 부친 뻘 되는 어르신에게 담배를 꿔달라고까지 하진 말자는 거다.
아무리 예절이 상실된 세상이라지만 아버지에게 담배를 달라는 자식은 여태 못 봤다.
= "왜 나를 잡나요 (왜) 왜 나를 잡나요 (왜) 남의 속도 모르면서 싫다고 하더니 (싫어) 밉다고 하더니 (미워) 나를 나를 왜 자꾸 잡나요 외로운 내 마음을 알기나 하듯이 아픈 가슴 파고들 때면 밉다가 고운 사람 곱다가 미운 사람 내 마음을 흔드는 사람 왜 나를 잡나요 (왜) 왜 나를 잡나요 (왜) 남의 속도 모르면서“ = 2003년에 발표한 하춘화의 <남의 속도 모르면서>이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자신이 전문가인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꼭 있다. 이런 세태를 박국희 기자가 2024년 6월 1일 자 조선일보 [‘데스크에서’ 與 동요시킨 李 대표]라는 제목으로 이유 있게 잘 꼬집었다.
- “(전략) 총선 때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을 두고 지금껏 논란이 되는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경우처럼 정치인이 어떤 시대정신을 포착하느냐는 문제는 사실상 정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시민은 평생 검찰청 한번 갈 일도 없는데, 문재인 정권은 검찰 개혁만 부르짖다 집값만 2배로 올려놓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후략)” -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입때껏 검사 얼굴 한번 볼 일이 없었으니까.
남의 속도 모르면서 가뜩이나 비싼 담배를 거저 달라고 나를 자꾸 잡는 사람은 지금도 정말 싫다. 담배 살 능력 없으면 이번 기회에 아예 금연해!
■ "담배 끊는 게 얼마나 쉬운데요. 저는 백번도 넘게 끊었어요." - 마크 트웨인 -